군위의 역사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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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의 지명유래

군위읍

군위읍(軍威邑)은 본래 군위현(軍威縣)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오항(烏項) 아천(촌)衙川(村), 성지(城旨), 노상(路上),노하(路下), 우정(右政) 백령(白嶺), 오곡(梧谷), 동토(東吐), 상토(上吐)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노동멱현(奴同覓縣)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군위현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군위현이 상주목에 속하였고, 인종 21년 (1143)에 다시 군위현이 일선군으로 환속되었다. 고종 32년 (1895)에는 다시 군위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고종 33년(1896) 8월 4일 훈령 제 35호로 13도제가 실시 됨에 따라 경상북도 군위군에 속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위군(軍威郡) 남면(南面)의 중무(中武), 하무(下武) 용성(龍成), 서군(西君), 장수(長水), 지동(池洞) 구지(鳩池), 금곡(金谷)의 9개 마을과 서성면(西城面)의면곡(綿谷), 내량(內良), 외량(外良), 구명(鳩鳴), 송현(松縣), 삽령(鈒嶺), 내북(內北), 외북(外北), 중북(中北)의 9개 마을과 소본면(召本面)의 농암동(籠巖洞)일부와 의성군(義城郡) 억곡면(億谷面) 용대(龍臺), 토일(吐一)의 2개 마을을 병합하여 군위면(軍威面)으로 개편하여 무성(武成), 수서(水西), 사직(社稷), 금구(金鳩), 내량(內良), 외량(外良), 삽령(鈒嶺), 대북(大北), 동부(東部), 서부(西部), 정동(政洞), 오곡(梧谷), 하곡(下谷), 상곡(上谷), 용대동(龍臺洞)의 15개동(洞)을 관할하였다.

1915년 1월 1일 부령 제173호로 의성군 소문면(현 용대리)이 군위군 군위면에 편입되었으며(1914년 12월 22일 편입 결정),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의성군 금성면(義城郡 金城面) 광현 1, 2, 3동(廣峴 1, 2, 3洞)을 편입하여 16개 동을 관할 하였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軍威面)이 군위읍(軍威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소보면(召保面)의 대흥 1, 2동(大興 1, 2洞)을 편입하였다. 1996년 3월 13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군위읍 서부1리가 서부 1, 3리로 분리되어 현재 34개의 행정리와 이에 속한 57개의 자연마을을 관할 하고 있다.

금구리(金鳩里)
  • 금구리(金鳩里)
    • 금구1리(金鳩1里)에는 금곡(金谷)[쇳골, 쉿골, 싯골] 마을이 속해 있는데, 금구리(金鳩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뒷산에 금을 캐던 광산이 있어서 금이 나는 골이라 하여 금의 골[金谷] 즉 쇳골, 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동네 뒷산이 삼곡(三谷)으로 이루어져 있어 골이 세 개 있다는 뜻으로 싯골[三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마을이 지금보다 훨씬 위쪽에 있었는데 너무 높아 지금의 마을 위치로 이주하였으며, 400여 년 전 안동권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 금구2리(金鳩2里)
    • 금구2리(金鳩2里)에는 구지(鳩池)마을이 속해 있다. 금곡(金谷)[쇳골, 쉿골, 싯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비들못, 비토지(非吐地)라 부르기도 한다.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어떤 중의 말대로 못을 파고, 제사를 지내는데 못 한 가운데서 비둘기가 날며, 소나기가 쏟아져서 못에 물이 가득 차게 되어 비토지 또는 비둘기 못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1500년경 조씨(趙氏)들이 지금의 구지(鳩池) 자리에서 득세를 하고 있었는데, 관(官)에서 득세를 싫어하여 멸하고 그 자리에 못을 팔 때 비둘기가 나왔다하여 구지(鳩池)라 했다고도 한다.
내량리(內良里)
  • 내량1리(內良1里)
    • 내량1리(內良1里)에는 안면실(內棉谷)[안마을], 바끗(깥)면실(外棉谷)[뒨짐이, 들마을, 철점(鐵店)] 마을이 속해 있다. 안면실(內棉谷)[안마을]은 어리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량리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1400년경 탑리에서 문씨가 목화씨를 가져와서 재배하여 그 생산량이 많아 면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서 옛날에 활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으며, 미영[목화]을 많이 생산 하였다고 한다.
  • 내량2리(內良2里)
    • 내량2리(內良2里)에는 어리실[양곡(良谷), 어리곡(魚里谷), 언실] ,구명(鳩鳴)[안어리실, 귀명, 어리곡(魚里谷), 양곡(良谷)], 양천(良川)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어리실[양곡(良谷), 어리곡(魚里谷), 언실]은 내량2리와 외량2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위천이 갈라졌다가 다시 어울린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옥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하였고, 구 후 1408년 홍계강(洪季康)이 정착하여 마을의 뒷산이 어질 량(良)자와 같다고 하여 어리실[良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구명(鳩鳴)[안어리실, 귀명,어리곡(魚里谷), 양곡(良谷)]은 어리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내량리의 중심 마을이다. 주변에 비둘기가 많아 날이 저물면 집으로 날아들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천(良川)마을은 위천의 서쪽 안어리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위천의 양기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흥리(大興里)
  • 대흥1리(大興1里)
    • 대흥1리(大興1里)에는 보동(甫洞)[보리골, 보로골, 보로동(甫老洞)], 웃진사[웃마], 아랫진사[아랫마]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보동(甫洞)[보리골, 보로골]은 대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16세기 초 통덕랑 홍유(通德郞 洪曘)가 개척하여 보로동(甫老洞)이라 하였다 하기도 하고, 고성이씨가 개척하여 보동(甫洞)이라 불렀다 하기도 한다. 웃진사는 보로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1807년(순조 7) 이정우(李廷佑)가 진사(進士)가 되어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아랫진사는 1798년(정조 22) 이광덕(李匡德)이 진사가 되어 거주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대흥2리(大興2里)
    • 대흥2리(大興2里)에는 농암(籠巖)[농바우, 농바위] 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17세기 초 옥고(玉沽)라는 선비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하며, 농암(籠巖)이라는 마을명은 마을 뒷산에 장롱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그러나 마을 뒤에 연안이씨의 선조가 세웠다는 청풍정(淸風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연안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이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제와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
동부리(東部里)
  • 동부1리(東部1里)
    • 동부1리(東部1里)에는 오항(烏項)[골안(谷內), 오뭇골, 오미곡(烏尾谷), 올미골, 오미골(烏尾谷)]마을이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아천(촌)(牙川, 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아촌(牙村) 남쪽 골짜기 안의 지형이 까마귀 꼬리 모양 같다고 하여 오미곡(烏尾谷)이라 불렀다. 한 때 까마귀 20여마리가 서식하여 마을 이름에 걸맞았으나, 지금은 이름만 오미곡(烏尾谷)이라 불린다.
  • 동부2리(東部2里)
    • 동부2리(東部2里)에는 아천(촌)(牙川, 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 성지동(城旨洞)[쇠동골(쇳동골)]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아천(촌)(牙川(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마을은 동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읍사무소가 위치한 중심 마을로 아천(牙川)가에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아천(雅川)으로 불리워 지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외량리(外良里)
  • 동부1리(東部1里)
    • 조선 정종 때 옥씨(玉氏)가 지금의 마을 앞 남쪽 400m 지점에 마을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는데, 응계 옥고(凝溪 玉沽)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掌令)에 오르는 등 출세를 하자 옥상(玉相)터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의 호가 응계(凝溪)라 하여 마을 이름을 응천(凝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조선 중엽 참봉 홍우식(洪禹軾)이 금구동(金鳩洞)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근처에서 이 마을이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가장 많으며, 어진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어르실[양곡(良谷)]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홍씨문중(洪氏門中)이 대성(大盛)하였다고 한다. 칠탄(七灘)마을은 개봉 못 아래 있는 마을로 안어리실 건너편에 위치하며, 남양홍씨가 많이 산다.
  • 외량3리(外良3里)
    • 외량3리(外良3里)에는 새터(新基)마을이 속해 있다. 1924년 소보면 대흥동(현 군위읍 대흥동)에서 홍재원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몇 집뿐이었던 것이 농암(籠岩)의 연안이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이루면서 새터[新基]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입구에 일자봉이 있는데, 대흥동(大興洞) 부근에서 남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을 삽령동(鈒嶺洞)의 여인이 보고 산이 걷는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멈추었다는 전설이 잇으며, 산의 모양이 일자(一字) 같이 되어 있다.
대북리(大北里)
  • 대북리(大北里)는 2개의 행정리에 1600년경 인근 외량동(外良洞)에서 남계 이보(南溪 李補)가 이주하고, 중국절강성 장군 장해빈(中國 折江省 將軍 張海濱)이 임진왜란 때 와서 참전하였다가 부상당하여 이곳에 피신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본래 군위현 서성면(西城面) 지역으로 군위 읍내 북쪽 꼴짜기가 되므로 북실(북동)이라 하였다.
  • 대북1리(大北1里)
    • 대북1리(大北1里)에는 너운골【너문골, 월곡(越谷)】, 큰마을【큰마아,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 소촌(蘇村)정북(正北), 위촌【이촌(李村), 외촌(外村),외북(外北)】마을이 속해 있다. 너운골【너문골, 월곡(越谷)】은 중심마을인 대북리(大北里) 중북동(中北洞)에서 보면 남쪽에 골을 넘어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큰마을【큰마아, 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에 살던 절강장씨들이 고개를 넘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큰마을【큰마아,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은 절강 장씨가 이마을로 이주하면서 중화촌(中華村) 또는 중북촌(中北村)이라 부르다가 한일합병 후 대북동(大北洞)에 편입되면서 대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강장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다른 동네 사람들은 장촌(張村)이라 하고, 가까운 대북리(大北里) 내에서는 큰마을이라 부른다.
  • 대북2리(大北2里)
    • 대북2리(大北2里)에는 내북(內北)【내북동(內北洞)】, 서원(書院)【서원동(書院洞)】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내북【내북동】은 동네 주변이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골안에 동네가 있어 내북동(內北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원(書院)【서원동(書院洞)】은 남계서원(南溪書院)이 마을에 있었던데 유래된 동명이다.
서부리(西部里)
  • 서부1리(西部1里)
    • 서부1리(西部1里)는 노하(路下)【밤마실】마을이 속해 있는데 서부리의 가장 큰 마을로 위천가에 밤나무가 많아 밤마실이라고도 한다. 약 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 서부2리(西部2里)
    • 서부2리(西部2里)에는 노상(路上) 마을이 속해 있는데, 노하 위쪽에 마을로 각종 관청들과 옛 관아의 터들이 밀집하고 있는 마을이다. 약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 서부3리(西部3里)
    • 서부3리(西部3里)에는 구 군청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본래 군위현 현내면(縣內面) 노하동(路下洞)에 속하였다.
수서리(수서리)
  • 수서리는 2개의 행정리에 서군동(西君洞),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 배다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무순(崔武順)이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서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한다.
  • 수서1리(水西1里)
    • 수서1리(水西1里) 서군동(西君洞)【서구이】이 속해 있다. 수서리(水西里)에 으뜸가는 마을로 옛날 동네 앞 강변 서쪽에 큰 호수가 있어 서호동(西湖洞)이라 불렀으며, 동네 중앙에 서호재사가 있었다. 동네 입구 강에 서군교(西君橋)가 있고, 산골에 (西君池)가 있다.
  • 수서2리(水西2里)
    • 수서2리(水西2里)에는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 배다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은 서군동(西君洞)【서구이】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동네가 계곡에서 약 2km 정도 들어간 곳에 있어 안장수골이라 부르며, 안장수골에서 안쪽으로 약 2km의 계곡이 뻗어 있어 수원이 풍부하다하여 장수골(長水)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성김씨, 경주최씨, 분성배씨 3성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개척되었다 하거나, 1620년 (광해군 12)에 최씨가 개척하였다고 도 한다.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은 위천변에 위치하여 배로 건너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라고도 한다. 약 80여년전 안마을에 살던 분성배싸(盆城裵氏)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 장수동 바깥쪽에 새롭게 생간 마을이라 하여 외장수동(外長水洞)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곡리(오곡리)
  • 오곡리는 1개의 행정리에 오실(梧實)【안마을, 오곡(梧谷)】, 거릇마【그릇마】, 양지말【양지편(陽地便)】, 음지말【음지편(陰地便)】, 느치미【미치이】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오실(梧實)【안마을, 오곡(梧谷)】은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며, 거릇마【그릇마】는 오실(梧實) 마을 서쪽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본동(本洞)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길 곁에 있으므로 거릇마라 부른다.
용대리(용대리)
  • 용대리는 용대(龍台) 수암(水岩)【무지바우】, 새터【新基】, 장자곡(長子谷)【장자골, 장자울, 장자곡】, 양지(陽地)【양지마아】, 店村【점마아, 점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는데, 용대(龍台)는 고려말 김해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뒷산의 형세가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용대(龍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수암(水岩)【무지바우】은 300년 전 청주 한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장자골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기암괴석이 많고 수질이 좋으며, 4시(四時)로 물이 나오는 바위가 있어서 수암(水岩)이라하였다. 새터【新基】는 장자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그 시기는 알수 없으나, 점마아에서 주민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장자골(長子谷)【장자골, 장자울, 장자곡】은 용대(龍台) 서쪽에 위치하며, 부자가 많이 살았던 마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양지(陽地)【양지마아】는 양지 바른 마을이므로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점촌(占村)【점마아, 점마을】은 장자골 북쪽에 위치하며, 옹기를 굽는 점골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점마아 중앙에 옹기점 터인 점터가 있다.
정리(政里)
  • 정리(政里)는 3개의 행정리에 우정동(右政洞)【우정골(右政谷)】, 좌정골【좌정곡(左政谷)】, 백령동(白嶺洞)【흰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있다.
  • 정1리(政1里)
    • 정1리(政1里)는 우정동(右政洞)【우정골(右政谷)】이 속해 있다 선방산(船放山)을 향하여 우축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나씨(羅氏)가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정골(右政谷)】이라 불렀다 한다.
  • 정2리(政2里)
    • 정2리(政2里)에는 좌정골【좌정곡(左政谷)】이 속해 있다. 선방산(船放山)을 향해 좌측에 위치하며, 나씨(羅氏)가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정골(右政谷)】이라 불렀다 한다.
  • 정3리(政3里)
    • 정3리(政3里)에는 백령동(白嶺洞)【흰재】이 속해 있으며, 좌정골【좌정곡(左政谷)】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통덕랑 이광철(通德郞 李光哲)이 1529년 정착하여 흰 바위가 많기 때문에 흰재(白嶺)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일설에는 한 노인이 지금의 백령리(白嶺里) 흰재를 지나다가 길지(吉地)임을 알아보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흰 바위틈에서 백마(白馬) 한필이 긴 울음을 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후 이 마을을 백마(白馬)라 불리어졌으나, 흰말을 싫어하는 풍습이 있어 백령(白嶺) 흰재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하곡리(下谷里)
  • 하곡리(下谷里)는 가리미【부처가리미, 가음(佳音), 갈음리(喝飮里)】, 동토일(東吐日)【동리(東里), 동토(東吐)】, 동곡(東谷)【동골, 솥골, 속곡(束谷)】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상곡동(上谷洞)의 토일(吐日)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토일 또는 하토곡(下吐谷)이라 하였다.
  • 가리미【부처가리미, 가음(佳音), 갈음리(喝飮里)】는 갈림길 즉 의성 탑리, 상곡, 용대의 삼거리에 있는 분기점이다. 동네 중앙에 약 200년 전에 만들었다는 부처【미륵】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리미라고도 하며 또 앞산이 갈마음수형(갈마음수형)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이 마을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형성되었는지 는 알수 없다 동토일(東吐日)【동리(東里), 동토(東吐)】은 하곡동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며 , 토일(吐日)의 입구가 되는 마을로서 옛 성터인 마정산 아래에 자리 잡아 있다가 불탄 후에는 동쪽으로 옮겨졌다. 군위읍에서 볼때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동리(東里) 불렀다.
광현리(廣峴里)
  • 광현1리(廣峴1里)
    • 억곡(億谷)[윗마, 무쇠골, 무이쇠골, 억실, 대리동(大里洞), 상리(上里), 사창(社倉)] 마을이 속해 있다. 조선시대에 억곡면(億谷面) 소재지로서 큰 마을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대리동(大里洞)이라기도 하였다. 억곡(億谷)은 속칭 억실 또는 사창(社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사창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윤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도 하며, 계곡이 많이 있다하여 억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 광현2리(廣峴2里)
    • 장대곡(長大谷)[장때골, 장대골, 하리(下里)] 마을이 속해 있다. 대리동(大里洞)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리(下里)로 불렀다. 장대골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약 200여 년 전에 장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여승의 성품이 장대처럼 곧아 그 분의 성품을 본 따서 된 마을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장자터라는 골에 장씨(蔣氏)가 번창하게 살았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길어서 장대곡(長大谷)이라 불렀다 한다.
  • 광현3리(廣峴3里)
    • 널브이[널분이, 널빙이, 판번(板番), 넓으리]가 속해 있다. 억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1550년경 여주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의성군 억곡면(億谷面) 소재지였던 마을이었다. 마을의 지형이 빈 널[棺]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거나, 골짜기가 넓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무성리(武成里)
  • 무성1리(武成1里)
    • 용산(龍山)[용성(龍城)]이 속해 있는데, 중무(中武)[내민(羅)]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로 위천(渭川) 동쪽 용산(龍山) 기슭이 된다. 1450년경 성씨(成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남서쪽 위천의 깊은 소에서 용이 승천하였고, 용산도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용산(龍山)[용성(龍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 무성2리(武成2里)
    • 하무(下武)[아래내민(下南面 ·下羅)]가 속해 있다. 중무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1300년경 엄씨(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 뒷죽고개가 있어 여기에 안개가 끼면 호우가 시작되어 위천이 범람하므로 수해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 무성3리(武成3里)
    • 중무(中武)[내민(羅)], 상무(上武)[웃내민(上羅), 상남면(上南面)] 등의 마을이 속해 있다. 중무(中武)[내민(羅)]마을은 위천 서쪽에 있는데 1700년경 김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1500년경 옥씨(玉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상무(上武)[웃내민(上羅), 상남면(上南面)]는 중무(中武)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위천 서쪽에 있는데 1450년경 박씨(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군위읍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위천의 상류에 있어 상자(上字)가 붙었고, 면사무소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남면(上南面)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마을 뒤에 적라산(赤羅山)이 있고, 신라 경덕왕 때 이 마을이 무사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상무(上武)[웃내민(上羅)]라 하기도 하였다.
사직리(社稷里)
  • 사직1리(社稷1里)
    • 사직동(社稷洞[사직(社稷)골, 사단골(社壇谷), 사당곡(社堂谷)]이 속해 있으며, 사직단(社稷壇)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550년경 박한남(朴翰男) 장군의 선조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박한남(朴翰男) 장군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모신 공으로 사당을 지어 모셨으므로 사당[社堂谷]이라 불려졌다하기도 한다.
  • 사직2리(社稷2里)
    • 이전에는 지동(池洞)[못골]이라 불렀는데, 사직1리(社稷1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 밀직사 최성우(密直司 催成雨)가 개척하였으며, 소(沼)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동(池洞)[못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삽령리(鈒嶺里)
  • 삽령리는 1개의 행정리에 삽재[삽령(鈒嶺)], 큰골[대곡(大谷)], 등너매[작(적)은골, 정골]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1670년(현종11) 홍성(洪晟)이 이 마을을 개척하고 신성리(新城里)라 불었다.
  • 삽재[삽령(鈒嶺)]는 약 270여 년 전 남양홍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면서 신성(新城),신성(薪城)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재[고개]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삽재[삽령(鈒嶺)]로 불리고 있다. 큰골[대곡(大谷)]은 삽재[삽령(鈒嶺)] 남쪽에 위치한 제일 큰 마을로 골이 깊고 커서 큰골[大谷]이라 불린다. 등너매[작(적)은골, 정골]는 삽재[삽령(鈒嶺)]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골이 얕고 작아 작은골이라 불렀고, 큰골에서 작은 구릉 너머가 되므로 등너매라 부른다.
상곡리(上谷里)
  • 상곡리는 토일(吐日), 샘위뜸, 군위편(軍威便)[아래뜸], 안말, 양지뜸, 의성편(義城便), 극락(極樂)[극내기]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나, 마을의 확실한 역사는 알 수 없다. 토일(吐日) 위쪽이 되므로 웃토일, 상토곡, 상토동, 상토라 하였다. 토일(吐日)은 동래정씨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군위읍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방산(船放山)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모습이 토시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의 북쪽에 지보사(持寶寺)가 있는데, 절의 경내에서 황청토를 캐내어 염색재료로 썼기 때문에 보물을 가진 절이라 하여 지보사(持寶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샘위뜸은 토일(吐日) 내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씨(徐氏) 일족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 아래뜸 군위편(軍威便)은토일(吐日) 내의 아랫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 마을 최대의 저수지가 있다. 안말은 토일(吐日) 내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양지뜸은 토일(吐日) 내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세대수가 가장 많으며, 양지쪽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의성편(義城便)은 토일(吐日) 내 동쪽에 위치하며, 의성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산의 모양이 아담하고 이 산을 넘으면 의성(義城)이 된다. 극락(極樂)[극내기]는 토일(吐日) 북쪽, 군위읍(軍威邑)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10가구가 넘으면 재난이 닥친다 하며, 극락사(極樂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보면

본 면은 고려시대 이전의 연혁이 문헌에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 조선시대 화곡면, 소소보면, 석본면으로 군위현에 속하다가, 고종 32년 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부, 군, 면을 통폐합함에 따라 소소본면의 10개동(대흥, 농암, 상소, 하소, 범바, 부흥, 달천, 언실, 모로, 상우), 석본면의 7개동(서경, 괘겸, 평지, 산법, 하계, 상원, 안령), 화곡면의 12개동(화실, 사촌, 달산, 낭성, 백현, 보촌, 복성, 율리, 사지, 두개, 수철, 대량), 선산군 산동면의 3개동(신흥, 산개, 오류)를 병합하여 소보면이라 칭하고 있다.

사리리(沙里里)
  • 들이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낙동강의 지류가 흐르며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위천변이라 모래가 많은 마을이란 뜻으로 사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율리, 중산, 새기터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사리1리
    • 율리 : 율리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앞에 밤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산 : 중산마을은 사리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사리2리
    • 새기터 : 새기터마을은 옛날에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는 뜻에서 사지라고도 한다.
보현리(寶峴里)
  •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보촌과 흰티의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보현1리
    • 보촌 : 뒷산에 철광이 있다하여 보촌이라 하였으며 서쪽에 시팡이곡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쇠를 팠다고 한다.
  • 보현2리
    • 흰티 : 옛날 나무가 없을 때 산의 흙이 희게 보였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그리고 보현2리에 속한 작은 마을로 옹기를 구웠다고 하여 점동네라는 자연부락이 있으며 그 자취로 지금도 사기 그릇조각이 남아 있다.
복성리(福星里)
  • 들이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복샘이 있으므로 복성리라 하였다. 집리, 굴티, 황산동, 중산, 독정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자연부락별 유래
    • 집리 : 집들이 모여있다하여 집리라 하였으며 본 마을명의 유래와 동일하다.
    • 황산동 : 복성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뒤의 산이 거칠다 하여 황산이라고 하며, 마을 뒷골에 황물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 굴티 : 복성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비탈에 비스듬히 자리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산 : 복성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복성동과 사리동 사이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중산이라 한다.
    • 독정 : 복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마을 옆에 정자가 한 채 있다하여 독정이라 부른다.
위성리(渭城里)
  • 위성리는 4개 행정리에 속한 화실,대량, 낭자, 사촌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위성1리
    • 화실 : 위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 초에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뒷산 산세가 매화처럼 되었다하여 화실이라 하였다.
    • 한골 : 옛 고을이 있었다고 하여 한읍이라 하다가 뒤에 한골이 되었다.
  • 위성2리
    • 대량 : 낭자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어진 사람이 많이 나도록 하기 위하여 대량이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혹은 장사가 많이 났다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아이는 형제만 낳아야 하며, 3형제가 되면 한 집이 망하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 화창 : 조선 연산군 때 이표가 선전관으로 부임하여 사창을 개설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백성들의 살림을 돌보았다고 한다. 사창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사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화창이라부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위천이 있어 육로가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 소금배가 이 길을 따라 마을 앞까지 들어 왔다고 하며, 화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의성 비안으로 갔다고 한다. 본래는 여기가 소보면 소재지였다.
  • 위성3리
    • 낭성(낭자) : 320년 전 행주은씨가 개척하여 냉재라 하였는데 후에 낭자로 되었다 한다. 옛날 이 곳에 성이 있었고, 지금도 성터가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하기도 한다. 또 큰 강이 마을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성을 쌓아 놓은 듯 하여 낭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기도 한다. 또 위천수와 모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낭성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 위성4리
    • 사촌 : 류씨가 처음 개척하였으며, 약 450여 년 전 마을에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사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산리(達山里)
  • 달산리는 2개의 행정리에 속한 두란 엄문, 법주, 수철, 흠걸 등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달산 1리
    • 두란(달목) : 두란은 달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다. 달목은 이씨와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마을 이름인 달목은 뒷산에 망월소, 망산 등이 있는데, 정월 대보름이면 달을 보고 놀았다는데서 "달을 눈으로 보는 등성이" 곧 달목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 아래에 마을이 있어 달산이라 불렀다 하기도 한다.
    • 엄문 : 달산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영월엄씨가 많이 살았던데서 유래하였다.
    • 양지(陽地)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金水골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달산2리
    • 법주 : 엄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법주사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개척시기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의 형상이 행주형이라 독천을 파는 것은 배의 밑을 뚫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샘은 파지 않았다. 현재는 기와도 올리고 샘도 판다.
    • 흠걸 : 법주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홈돌이 있는데 , 수철에서 나는 물을 배다리로 통하게 하여 농업용수에 이용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수철 : 홈걸 남쪽에 있는 마을로 1370년경 남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산전을 일구어 살고 있었는데 산골짜기에서 쇠 조각이 붙은 광석이 많이 발견되어 마을 이름을 쇠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뒷산에 쇠가 나는 곳이 있고, 마을의 맞은편 조산 기슭에 냉정수가 흐른다고 하여 수철이라 이른다. 일제 강점 말기에 금, 주석 등을 채굴하다 해방후 폐광되었으며, 흔적이 남아 있고 쇠가 난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쇠점이 있었다하여 쇠점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두개실 : 엄문 남쪽에 있는 마을로 노씨들이 20여 가구가 살았으며, 남양홍씨의 재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재실만 남아 있고 모두 이주하였다.
송원리(松院里)
  • 송원리는 2개의 행정리에 안령(질매제), 시장, 대송, 석정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송원1리
    • 안령(질매제) : 송원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1514년 홍라호가 개척하여 주위의 산세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주마현곡이라 부르다가 마을 동편의 고개길이 말의 안장과 같다고 하여 안령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안령 뒷산이 말과 같은 형상에다 암산이므로 마암산이라 부르고 그 고개길이 소매와 같다고 해서 질매재라 불러 오고 있다.
  • 송원2리
    • 대송 : 질매재 서쪽에 있는 마을로 1500년 전 엄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많아 대송이라 하였다하나, 현재 소나무는 자취도 없다. 위성리 화창에 있던 소보면 사무소가 옮겨오면서 소재지로서 각종의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다.
    • 석정(돌정자) : 질매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북편의 큰 바위에 정자나무가 서 있어서 석정으로 불리워졌다.
    • 시장 : 1958년 소보시장이 개척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시장이 열리는 마을이라 하여 시장이라 하였는데 2,7일에 장이 선다. 면 행정의 중심지로서 농협, 우체국, 정류소 등이 있다.
신계리(新溪里)
  • 신계리는 1개 행정리에 화일, 신계(웃말), 상골, 상계동, 등의 자연 마을이 소속되어 있다. 마을을 개척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홍천최씨, 경주손씨, 동래정씨, 능성구씨가 개척하였다. 홍천 최씨가 최초로 개척하여 좋은 위치에 있다하여 화계라 했으며, 후에 손씨가 화계에 자리 잡았으며, 구씨가 위치하는 곳은 신흥이라 하였다. 화일은 옛날 방천에 복숭아꽃이 많아서 화일이라 불렸고, 양조장을 중심으로 화일장터가 있어서, 주막과 농기구, 농산물 등을 팔던 곳이었으나, 64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신계(웃말)는 신계리의 본동으로 경주손씨, 능성구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상골은 화일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의 위쪽에 있다하여 상계라 하였다.
도산리(桃山里)
  • 도산리는 2개의 행정리에 우무실, 원마, 새마, 칠봉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도산1리
    • 우무실 : 일선김씨 입향조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들어와 우무곡이라 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우무실이라 부른다.
    • 원마 : 도산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때 원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마 : 해주오씨가 우무실에서 이주하여 터전을 잡으면서 새로 개척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도산2리
    • 칠붕 : 칠봉마을은 우무실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의 일곱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려 있다하여 칠봉이라 불렀다. 300여 년 전 구미시 장천면 명곡동서 이주한 강화노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서경리(西京里)
  • 서경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이다. 차돌이 있는 산 밑이 되므로 돌밑, 또는 석영으로 불리우다가 변하여 서경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돌밑, 사창, 굼말, 안마을, 석하, 서경, 석영 용수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돌밑 : 돌밑(굼말, 안마을, 석하, 서경, 석영)은 본래 차돌이 있는 산 밑에 있다하여 돌밑, 또는 석영이라 불리다가 서경이 되었다. 삼국시대에 상주국과 서경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서경국의 수도였다는 속설이 있다.
    • 용수 : 서경동쪽에 있는 마을로 그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옛날마을 앞에 용수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서 용이 등천하였다하여 용소라고 불려졌다. 일설에는 영천이씨가 조상의 광중을 파다가 풍수가 풍령에서 백마를 탄 사람이 오기 전에 매장하라고 했다. 광중을 파던 중 석함이 나와 서로 다투는 중 그 사람이 나타나 석함을 깨니 잉어가 광중에서 나와 사라졌다. 그 후 자손들이 잉어가 잘 살라는 뜻에서 못을 팠다. 이 못을 어못, 어미골, 또는 용소라고 불렀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 한 것이라 한다.
평호리(平湖里)
  • 평호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자연마을로는 평지마, 개겸(낫거리), 우북동 등이 있다.
    • 평지마 : 평호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경주김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앞 들이 넓다하여 평지마라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평호동으로 고쳐 불렀다.
    • 괘겸(낫거리) : 평지마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세가 낫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김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산에 용천굴이란 동굴이 있는데 약 8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옛날의 피난처였다.
    • 우복동 : 현 구미시 산동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로 산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마치 소가 앉아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우복동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이 마을의 주민 생활이 인근 주민들보다 풍부하여 복이 많은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법리(山法里)
  • 산법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산골짜기가 되므로 산법리라 하였으며 산월,윗뜸, 거사골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산월(산법)이라는 명칭은 마을이 사방 산으로 둘러 싸였고, 산의 형세가 반월과 같이 생겼다하여 산월리라 불려졌다. 마을의 가까운 곳에 옛날의 절터가 남아 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리고 풀밭 가운데 흔적만 남아 있다.
내의리(來儀里)
  • 내의리는 3개 행정리에 대포, 감재, 상얌, 중얌, 하얌, 진재, 모로, 아래언실, 윗언실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근처에 있는 봉황산의 봉황이 와서 논다는 뜻인 鳳凰來儀를 차용하여 내의동이라 하였다.
  • 내의1리
    • 대포 : 임진왜란 때 장대봉에 대포를 놓고 쏘았다하여 대포라고 한다. 그 마을 앞을 대포들이라 하며, 이곳에 옛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 양암 (양바우, 얌대) : 내의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 숙종 때 최윤길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와 보니 마을 앞에 바위가 둘이 있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암 위쪽에 있다는 뜻에서 웃얌대(상얌)이라 불려 졌다고 하며, 양암 하류 쪽에 있다하여 아랫얌대(하얌)이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비안에서 피난 온 정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 내의2리
    • 진재 : 길고 험한 골짜기 재(진재) 밑에 있으므로 불려진 이름이다.
    • 모로동(모로골) : 행주은씨가 중국에서 건너온 후 그의 후손인 은상열이 1570년 개척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마을 뒤 골짜기 새빛이란 곳에서는 피란하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 내의3리
    • 언실 : 언실은 봉황이 오는 거동이 옷이 펄렁이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언실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언실이라 하며, 아래 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언실이라 한다.
봉황리(鳳凰里)
  • 봉황리는 3개의 행정리에 연곡, 호암(범바위), 달천, 월천 등의 지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봉황1리
    • 연곡(부엉이) : 마을 뒤에 연뱅이골이 있는데, 매우 긴 골짜기이며, 골짜기 안 연못에 연꽃이 피어서 연곡이라 한다. 부엉이라는 명칭은 전하는 말에 옛날 두모국의 왕이 적국 장사에게 쫓기다 환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장사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짐승에 비유하여 부엉이라고 불렀다 한다.
  • 봉황2리
    • 호암(범바우) : 마을 뒤의 바위가 범이 앉은 것 같은 형상이어서 범바우라 한다.
  • 봉황3리
    • 달천 : 마을 주변으로 위천이 흐르고 있는데 위천의 모양이 마치 달과 같이 둥글게 흐르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봉소리(鳳韶里)
  • 봉소리는 옛날 서씨 일가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마을이 번창하다가 성지라는 못을 파고부터 쇠잔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상소, 하소, 두못들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두못들 : 하소 서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로 삼한시대 때 두모국이 이곳에서 개국하여 선정하던 자리라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도들머리산의 기슭에서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 상소 : 봉소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서씨 일가가 처음 들어와 번창하다가 성지라는 못을 판 후 쇠잔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마을의 형성에 대한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 하소 : 봉소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상소와는 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위력곡이라는 골이 깊어 천수답시절에도 수리가 좋았고 한다.

효령면

현재의 효령면(孝令面)은 신라 초(490년경)에는 모혜현(芼兮縣)이었지만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효령현(孝靈縣)으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군위현(軍威縣)으로 예속되었다.

한편 孝靈이란 지명은 9세기경부터 孝寧(효령)으로 쓰여 오다가 15세기 孝寧大君(효령대군, 1396~1486)의 함자를 피휘하여 孝令(효령)으로 글자가 바뀌었다. 시대에 따라 효령의 령이 靈→寧→令으로 변하여 간 것이다.

처음 지명 孝靈(효령)은 孝(효)에 정령(精靈 ; animism)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지명의 유래는 마을사람들이 김유신장군을 어버이처럼 섬긴다는 의미에서 경덕왕이 만든 이름이다. 현재 쓰이고 있는 孝令(효령)이란 지명은 백성들의 마음씨가 착하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 효령면의 치소(관아)는 현재의 효령면 장기3리 고지바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건물도 모두 없어졌다. 옛 기록에 따르면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동남쪽 70여 걸음 되는 곳에 임창(任倉)이 있었고 동북쪽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옥사(獄舍)가 있었으며 또 북쪽 3리쯤 되는 현재의 장군1리(나실)에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쓰이고 있는 효령(孝令)라는 지명은 박약지(朴約之)가 17세 때 부친상을, 그리고 모친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에 각각 3년간 묘(墓)를 지키며 효(孝)를 정성껏 하던 중, 어느 날 들불이 일어나 여묘까지 번지려 하자 약지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孝” 자를 따서 孝令이라 친하였다고 함.

노행리(老杏里)
  • 4개의 자연부락 노매실(老梅實), 도장곡(道藏谷), 행동(杏洞), 심원(深源) 중에서 중심이 되는 노매실(老梅實)과 행동(杏洞)을 합쳐 노행리(老杏里)로 불림.
  • 노행1리
    • 노매실(老梅實) : 마을 북쪽에 학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산봉우리 모양이 매화 봉우리 같다하여 노매실(老梅實)이라는 설과 마을 앞 서당산이 마치 매화가 떨어져 봉우리를 맺고 있는 듯한 형세라 하여 마을명을 노매실(老梅實)이라 했다는 설이 있음.
    • 도장곡(道藏谷) : 선비들이 수도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도장곡(道藏谷)이라 설과 군량미를 저장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 노행2리
    • 노매실(老梅實) : 마을 북쪽에 학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산봉우리 모양이 매화 봉우리 같다하여 노매실(老梅實)이라는 설과 마을 앞 서당산이 마치 매화가 떨어져 봉우리를 맺고 있는 듯한 형세라 하여 마을명을 노매실(老梅實)이라 했다는 설이 있음.
    • 도장곡(道藏谷) : 선비들이 수도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도장곡(道藏谷)이라 설과 군량미를 저장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오천리(梧川里)
  • 옛날 어떤 효자가 시묘때 까마귀와 함께 살았다하여 오산이라 하였고 그 뒤 오심(梧深)이라고 불렀으며, 한일합방이후 오천(梧川)이라 하였음.
  • 임란 전까지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거주하였으나 임란 후 장사진이 기창 의병 하였다가 마시령산에서 전사 후 장씨 일족이 몰락 후 문화류씨(文化柳氏)가 정착하여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 번성하였다.
성 리(城 里)
  • 약 500년 전에 도운봉공(都蕓峯公)이 참나무 숲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작골(柞谷)이라 하였고 성령산하(城嶺山下)로서 성리(城里)로 개칭(改稱)됨
    • 성(城)1리 : 지금부터 약 200년전에 성령산(城嶺山) 아래 바깥쪽에 있다하여 외성(外城)이라고 하였으며, 바깥작골이라고도 불림.
    • 성(城)2리 : 성령산(城嶺山) 아래 안쪽에 있다 하여 내성(內城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안작골이라고도 불림.
병수리(竝水里)
  • 고려시대에 형성 되었다고 하며 사창천과 위천이 합류되는 지점 이어서 아무리 한발이 심해도 군과 병졸 그리고 일반인의 식수가 충분하였다 하여 간동(澗洞)이라고 하였다는 설
    역촌으로서 서울, 대구, 안동, 경주 등지의 행인과 군마와 병사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전해 오고 있음.
  • 병수(竝水)는 양합류 저점이라 하여 불러진 이름으로 옛날 벼슬아치들이 군위 병수합수 구경 가자고 할 만큼의 명승지이기도 하였다.
불로리(不老里)
  • 약 260여년전 양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처음에는 불미동(不味洞)이라고 불렀다가 그 뒤 어떤 효자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적라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밤마다 기원하던 중 어느날 밤 부처로부터 부친의 건강을 약속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아버지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어 이후로부터 이 계곡을 절골이라하고 노불상(老佛像)이 나타났다하여 불로리(不老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내리리(內梨里)
  • 약 250년 전 손인부 선비가 이곳에 정착할 당시 외현(外峴)과 내현(內峴)사이에 커다란 배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 이현(梨峴)이라 부르다가 이곡(梨谷)이라 불려졌으며 배타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내리리(內梨里)로 불려지고 있다. 옛날 이곳 주민들은 선산군 장천장을 보아 왔는데 험준한 뱃고개에서 종종 도둑이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하여 100여 명씩 떼를 지어 도둑의 습격을 막았다고 한다.
중구리(中九里)
  • 300여 년 전 제일 먼저 정착한 길씨(吉氏) 집안에서 마을 터를 닦을 때 대나무가 많아서 죽리(竹里)라 불렀으며, 그 뒤 대나무가 점점 없어져 현재는 몇 집 정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죽리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효령면(孝令面)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하여 지금은 중리(中里)로 불려지고 있다.
장기리(場基里)
  • 장군리(將軍里)의 양지나실(陽地羅室)과 마주 보고 있으므로 음지나실(陰地羅室)이라 하며, 신라 경순왕 때에는 내동(乃東)이라 부르다가 한일 합병 뒤에 옛 효령(孝令) 시장터라 하여 장기리(場基里)라 부른다.
장군리(將軍里)
  • 신라가 삼국통일 할 당시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던 중 이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그 후 고려 말엽 이 곳 주민들이 옛 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군당을 짓고 김유신, 이무, 소정방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3월 초에 향사를 지냈다. 3명의 장군이 쉬어 갔다 해서 뒷산에 효령사(孝靈祠)를 짓고 마을을 장군리(將軍里)라고 불렀으며, 구효령(舊孝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곡리(高谷里)
  • 마을 뒤 계곡이 급하고 높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골짜기를 중심하여 서쪽 산맥을 긴재등이라 하고, 동쪽 산맥을 단봉(壇峯)이라 하였는데 단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창천(社倉川)은 가산성(架山城)을 쌓을 때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연유된다. 고곡(高谷)은 고암(高岩)이라 하였는데 동고암(東高岩), 서고암(西高岩)으로 나뉘고 동고암은 장기(場基) 1,2,3을 이르고 서고암은 대곡(大谷, 한실)을 일러 이를 합해 고곡리(高谷里)라 한다.
매곡리(梅谷里)
  • 옛날부터 매화가 많았다는 설과 골짜기에 동절에 눈이 많이 쌓여 꽃과 같았다는 데서 매곡(梅谷)이라 하였다 한다.
  • 매곡1리
    • 수동(壽洞) : 마을내 홍씨 정각 이름이 수산서당(壽山書堂) 이며 식수로 냇물을 먹고 생활하는데 장수하는 노인이 많고 부자가 많이 살고 정자가 좋아서 수동(壽洞)이라 전한다.
    • 상평(上平) : 현 고곡(高谷) 1리 입구 상에 있는 들을 상평(上平)들 이라고 하고 하에 있는 들을 하평(下平)들리라 하였으며 상평들에 농막(農幕)을 짓고부터 마을이 생겨서 상평(上平)이라 부른다.
  • 매곡2리
    • 독골(陶谷) : 임란시 피난온 도공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칡덩굴을 제거하고 개척하여 그릇을 굽어 만들었다고 하여 독골(陶谷)이라 불려지고 있다.
    • 탑들(塔坪) : 들 가운데 정자나무 옆에 塔이 있다고 생긴 마을 이름이라고 함.
거매리(巨梅里)
  • 리(里)의 모양이 매의 모양이고 큰 매화(梅花) 나무가 있었다고 거매(巨梅)라 불러졌다고 한다. 마을 뒤편 박타산 꼭대기에 보양사의 절터가 있으며 그 옆에 천당수라는 큰 못이 있어 가물 때 고사를 지내면 뜻이 이루어졌다 한다. 거매(巨梅) 동편에 윷판처럼 생긴 넙적한 바위가 있는데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잠깐 동안 윷을 놀고 간 손가락 흔적이 있다하여 그 바위를 유판지라고 하며 윷을 놀다가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마를 타고 한 번에 뛰어 닿은 곳이 장군리(將軍里)라 한다.
금매리(錦梅里)
  • 조선 중종(中宗) 때 성균관 진사 정은(鄭誾)이란 선비가 기묘사화 때에 화를 피하기 위하여 정착하였으며, 금곡(錦谷)과 신매(新梅)의 이름을 따서 금매(錦梅)라 불렀다고 한다. 금매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동편에 있는 마을을 삽실(鍤實)이라 하고, 새로 생긴 큰 마을을 신매실(新梅實) 이라 한다.
  • 마을에서 북동쪽 1km정도 떨어진 곳에 기암괴석이 있고 여름에는 찬물이 솟아 나오는 용솟음바위가 있고 외가리가 서식하는 황새마을이기도 한데 보호조 지정 마을이다.
화계리(花溪里)
  • 옛날 한양을 내왕하는 역이 있었으며, 약 400년 전 밀양(密陽) 손(孫)씨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 마을 안쪽에 마당산(馬堂山)이란 산이 있는데 역촌 당시 말먹이를 채취 하여 쌓아둔 곳이라 하여 마당산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소계(召溪)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화계(花溪)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라 때 경주의 나환자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곳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다가 병이 완치 되어 그 이후 경주(慶州)약수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소계(召溪)약수터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한다.
마시리(馬嘶里)
  • 약 700년전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이 곳을 개척하였고 마시(馬嘶)의 유래는 성진이란 스님이 천마시풍(天馬嘶風, 천마가 우는 형세)의 곳이라 말했다하여 지리 풍수설 그대로 마시리(馬嘶里)라 불렀다고 한다.

부계면

본 면은 고려왕조이전의 연혁은 문헌이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고려왕조에 부계현이라 칭하여 현내(창평,가호,춘산,신화) 현서(고곡, 매곡) 부남(대율,동산,남산) 3개면으로 구획하였다가 다시 조선초기에 이르러 의흥현과 합병되었던 것이 또다시 1914년 3월 부.군.행정구역 변경에따라 정비한 현내 현서 부남의 3개면을 합병하여 부계면이라 칭하고있다.

창평1리(昌平1里)
  • 마을 주요 연혁
    • 1580년 고려왕조 이전의 연혁은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서씨가 개척하였기에 서분이라하였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부계면 창평1동이라 칭하였음
  • 자연부락별 유래
    • 서분 : 186가구에 720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00년전에 달성서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서분이라 칭하였다 함.
    • 구방동 (九榜洞 ) : 19가구에 92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 초기에 이 마을 사람 9인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동행하였다가 다같이 진사에 급제 하였기에 구방동이라 칭하였다함.
창평2리(昌平2里)
  • 마을 주요 연혁
    • 안찰사 宣允使가 마을을 개척하여 동명을 남방(藍芳)이라 칭하였고 그후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창평2동으로 개칭하였음
  • 자연부락별 유래
    • 남방(藍芳) : 50가구에 320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60년전에 마을을 개척당시 남색 염치풀이 있다고 해서 남방이라 하였고 1667년 이안진 선생이 마을 앞 넙풀유지(溜池)를 만들고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을 조성하였다.
  • 전설 및 유래
    • 까치락 : 옛날 까치가 많이 살고있었다고 하여 까치락이라 함
가호1리(佳湖1里)
  • 마을 주요 연혁
    • 경주부군을 지낸 도이윤이란 사람이“이붓골”이라 하였으며 그후 이명곤이란 사람이 인동리라 개칭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가호1동이라 하였다.
  • 자연부락별 유래
    • 인동 : 26가구에 120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440년전에 경주부군을 지낸 도이윤이가 “이붓골”이라 하였다가 그후 이명곤이가 인동이라 칭하였다고 함
    • 가실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전설 및 유래
    • 이붓골 : 이조인조(李朝仁祖)때 도이윤(都以侖)가 경주부군을 지냈다가 후세에 뜻을 두고 본 마을에 왔으며 동명을 이붓골(義附골)이라 하였다.
가호2리(佳湖2里)
  • 마을 주요 연혁
    • 본래 의흥현 현내면 지역으로 고종 32년(1895년) 의흥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의흥군 현내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가호동(佳湖洞)에 속하게 하여 부계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함에 따라 가호2리(佳湖2里)로 개칭하였다.
  • 자연부락별 유래
    • 동림 (桐林) : 동림(桐林)은 400여년 전에 구씨(具氏)가 개척하였는 데 동쪽에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해서 동림(東林)이라 했다 하기도 하고, 고려시대에 동림사(桐林寺)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함
    • 살메기 : 45정의 산등에서 인공으로 메를 사육하며 각종 짐승을 잡은 구역을 칭함
춘산리(春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670년 경 연혁은 미정이며 창의리로 부르다가 현창이라 명칭하였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춘산동이라 하였다.
  • 자연부락별 유래
    • 현창(縣倉) : 36가구에 13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의흥현에 속하여 있을시 비축미를 보관하기 위하여 양곡을 쌓아두었기에 현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金水골 : 8가구에 32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년대는 미정인데 산 좋고 물이 좋아 이 골을 금수골이라 명하여 왔음
    • 양지(陽地) : 23가구에 7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이 양지 바른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양지 마을이라고 하였음
    • 새 터 : 6가구에 23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새로 생긴 부락이라 새터라고 전해지고 있음
  • 전설 및 유래
    • 國書堂 :朴姬詳 (여자)이란 사람이 사찰의 스님을 위하여 국서당을 지었음 지금도 건물이 있으며 돌 비석도 있음
    • 배나들목지 : 천지가 개벽했을 때 배가 드나들면서 배를 매어두었다던 곳이라 하며 쇠말뚝도 있었다함
    • 가매바위: 바위가 가마솥처럼 남아 있었기에 전해지고 있다.
    • 사구지미 : 옛날에 사기그릇을 구워 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율리(大栗里)
  • 마을 주요 연혁
    • 처음은 신천 강씨(康氏)가 살았다 하며 950년경 홍란(洪鸞)이란 선비가 이주해 왔으며 당시는 일야(一夜 )혹은 대야(大夜)라 마을명을 칭하다가 14세세손(世孫) 홍노(洪魯)때 부터 대율(大栗)이라 마을명을 불러 왔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율동(大栗洞)이라 개칭(改稱)하였음
  • 전설 및 유래
    • 한밤 : 옛날에는 마을이 삼존석굴암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차츰 동지남(東地南)으로 이동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서부지역은 개발이 늦으며, 현 위치에는 가옥을 많이 지었으며,밤나무를 많이 식재하여 한밤(大栗)이라 불리었으며, 홍란씨(洪鸞氏)가 500년 洪氏의 운(運)이 여기서 피어난다고 하였다 하며, 그 후는 어느 性이 지배할지 모른다고 하였다 함.
    • 오무당(五舞堂) : 옛날에 다섯 무당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오무당이라 전하여 지고있음
    • 미륵불(彌勒佛) : 일명 “대율석불입상“ 삼존석굴암 미륵불은 左像에 손을 쥐고있으나, 본 미륵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옛날에 두 불상이 다투어 서로 다친 곳을 잡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보물제988호)
    • 경의제(敬義祭) : 약 100년전 지은 건물로써 부림 홍씨의 학당이며 현재는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동산정(東山亭) : 돈영이란 도정 벼슬한 사람이 조상을 위한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건축 (1920년에 건립)
    • 고래들 : 논에 물을 대면 고래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물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해지고 있다.
    • 제방(堤防) : 경오년(庚午年) 일제 치하시에 팔공산 산사태로 인한 수해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후 전 동민을 동원하여 전장 500미터를 돌로 쌓은 정교한 돌제방이다.
동산1리(東山1里)
  • 마을 주요 연혁
    • 1450년 경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의흥현 부남 황청으로 전하여 오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산1동으로 개칭하였음
  • 자연부락별 유래
    • 황청리 : 54가구에 335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고려말엽에 강씨가 개척하여 부남(缶南)으로, 그 후 진(陳)씨 및 최(崔)씨가 황청(黃淸)으로 마을명을 부르고 마을이 하늘과 같이 맑은 뜻으로 전해지고있음
  • 주요전설 및 유래
    • 강번들 : 신라중엽에 강(康)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여 강번들이라 전해지고 있음
    • 송내 : 전설 및 유래는 알수 없으나 송내사(松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함
    • 오도암(五導岩) : 년대는 알수 없으나 五人의 중이 도를 닦기 위하여 절을 세운것 이라고 전해지고 있음
동산2리(東山2里)
  • 마을 주요 연혁
    • 1630년 경 洪樵隱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신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산2동이라 하였음
  • 자연부락별 유래
    • 莘 里 : 43가구에 183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350년전에 洪樵隱 이란 선비가 栗里로부터 이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 하여서 新里라 마을명을 부르다가 그후 莘里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음
  • 주요전설 및 유래
    • 遠慕齊 : 洪樵隱공의 時祭를 지내기 위하여 후손이 세운 祭室
    • 樵隱處士缶林洪公 藏修 遺之 : 이 碑石은 초은공이 처음 개척하였다고 후손들이 세운것이며 碑文은 근래 大儒이신 重濟 金榥이 지으셨다.
    • 宕巾바위 : 마을앞들가운데 조산에 있는 탑이 흡사 탕건모양 같다 해서 탕건바위라고 하며 전설에의하면 탕건바위가 밖을 보고 있기 때문에 外孫이 科擧에 급제 한다해서 탕건바위를 마을 안으로 보게 돌려 놓았다고 한다.
남산리(南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508년에 문헌이 없어 알수 없으나 中宗 庚寅八月에 書院이라 하였다가 그후 缶南으로 있을 당시 5개 자연부락을 1, 2동 분동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산동으로 개칭 하였음
  • 자연부락별 유래
    • 書 院 : 29가구에 168명의 가구가 살고있으며 약 470년전에 中宗 庚寅八月에 書院이라 하였다.(원래 院底洞)
    • 작은실 : 9가구의 2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원에서 북으로 약1.5㎞ 지점에 위치한 작은골에 자리 잡아 작은실이라 함
    • 갖 골 : 31가구의 159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 700년전 고려중엽때부터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부계면에서 제일 갓쪽에 위치하여 枝谷(가지골)이라 전해지고있음 缶林洪氏가 경기도로부터 南下-이 부락에 제일 먼저 基地한 부락임
    • 首 山 : 26가구에 128명의 가구가 살고있으며 약 1,000년전에 자연부락이 제일먼저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首山이라함
    • 屯 德 : 28가구에 165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약350년전에 부락이 생겨 군위군과 달성군이 접하고있어 이조중엽에 큰 陳을 친 곳이라 둔덕이라 하였음
  • 遺物 및 遺蹟
    • 三尊石窟庵 :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1407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며, 경주 석굴암보다 약 150년 앞서 세운 것 이라고 전해 지고있음 (1962년 12월 23일 國寶 제109호 지정)
명산리(明山里)
  • 마을 주요 연혁
    • 1580년 경주이씨가 개척하여 新光里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 明山洞이라 칭하였다.
  • 주요전설 및 유래
    • 경주이씨가 新光里에 정착할 당시는 양지바른곳에 아침해가 일찍 떠오른다고 신광리라하고 후에 경주김씨가 정착한 후 현 효령면 마시2리(한자골) 보다는 마을이 더 크고 위에 위치하고 있으니 위는 머리를 상징함으로 거수리라 하였음
신화1리(新化1里)
  • 마을 주요 연혁
    • 1480경 연혁은 알수없으나 거북이가 않은 자리와 같다고 하여 龜毛라고 하였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화1동이라 개칭하였다.
  • 자연부락별 유래
    • 龜 毛 : 35가구에 125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기 1480년경 거북이가 앉은자리와 같다고 龜毛라고 마을명을 지었다고 원래 현 마을 밑에서 동네가 개척되어 살다가 서기 1930년경 현재 살고 있는 마을로 이주 하였다고 함
    • 沙余谷(새락골) : 16가구에 75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1525년경에 밀양박씨가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고 강가 마을에서 왔다고 하여 새락골이라 함
  • 주요전설 및 유래
    • 왜두덕 : 서기 1678년경에 의병 홍천래장군이 처음 왜병과 교전하여 무찌른곳이라 왜두덕이라 하였음
신화2리(新化2里)
  • 마을 주요 연혁
    • 1670년 밀양박씨와 경주 김씨가 이마을을 개척하여 신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화2동이라 개칭하였다.
  • 자연부락별 유래
    • 新 月 : 22가구에 89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서기 1570년경 밀양박씨가 谷內에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 경주 김씨가 자리를 잡았다. 마을 이름은 新院이라고 하고 이마을앞에 조그마한 못이 있어 울창한 수목이 우거져 있어 수목사이에 여덟집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대사가 이곡내를 통하게 되어서 오다가 날이 저물어서 이연못 뚝에 올라 서서 연못을 내려다 보니 달빛이 연못에 비치자 대사가 하는 말이 과연 이 것이 신월이구나하여 그 후에 신월이라고 전해 지고 있다.
  • 주요전설 및 유래
    • 도둑골 : 옛날 도둑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에 도둑골이라 하였다.

우보면

우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우보인(以友補仁)"의 우애로써 인(仁)을 서로 돕는다는 뜻과 보(保)의 오래 보전시키자는 의미로 사용하게되었다고 함

나호리(羅湖里)
  • 상,하동(上, 下洞)의 모양이 나비와 같이 생겼으므로 나부리로 부르게 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국통산이 주룡(主龍)이고 금강(錦江)이 앞에 흐르고, 산천이 수려하다고 해서 나호(羅湖)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달산리(達山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소달동, 금동, 고산동, 원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소달과 고산의 이름을 따서 달산동(達山洞)이라 하고 군위군 우보면에 편입함.
  • 고산동(高山洞)〔새터, 고산골, 양지마〕은 앞뒷산이 높다고 해서 고산골이라 불리위지고, 또 새터 양지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양지마라고 부르기도 함.
  • 소달동(所達洞)〔솟달리, 솟따리〕는 앞뒤 산 모양이 솥의 다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솥다리라 부름
두북리(杜北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신기동, 두곡동, 북동, 원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두곡과 북동의 이름을 따서 두북동(杜北洞)이라 하고 군위군 우보면에 편입함
  • 조선 선조 40년(1607) 여주인 왕산 이계언이 마을을 개척하고, “산사두 이곡수(山四杜而谷邃)”하다 하여 두곡이라 했으며, 기와골〔북동(北洞)〕은 옛날 이 마을에서 기와를 구었기 때문에 기와골이라 불렀음
모산리(毛山里)
  • 모산리는 새터〔옥전동(玉田洞)〕,소실〔우곡(牛谷)〕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으며, 마을의 개척과정은 잘 알 수 없음
  • 새터는 모산리에 속한 한 마을이나, 모산리보다 늦게 생겼으므로 새터라 부르게 되었고, 소실 뒷산 모양이 흡사 소가 누워있는 것과 같아하여 붙여진 이름임
문덕리(文德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덕산동과 우평동, 문암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덕산의 이름을 따서 문덕동이라 하고 우보면에 편입됨
  • 껏득골〔거평(巨坪), 덕산동(德山洞)〕은 좁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으나, 마을 앞의 들이 비교적 넓다하여 거들이라 하다가 껏득골이라 부르게 됨
미성리(美城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성평동, 부석동, 미대동, 이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미대와 성평의 이름을 따서 미성동이라 함
  • 성들〔성뜰, 성평동(城坪洞)〕은 임진왜란 당시에 마을 뒷산(단산)에 성을 쌓았는데 이 마을이 그 산성 아래 위치하고 있으므로 성들이라 하였으며, 미대 동(美垈洞)〔생이골, 상여골〕은 이 마을에 상여집이 있었다고 하여 상여골이라 함. 상여골은 발음 변화로 생이골이라 부르게 됨
봉산리(鳳山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봉강동과 고산동, 무둔동, 원당동의 각 일부와 군위현 중리면 수락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봉강(鳳岡)과 고산(高山)의 이름을 따서 봉산 동이라 함
선곡리(仙谷里)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선동, 원계동 일부와 의성군 산운면의 개일동 일부를 병합하여 선동과 개일의 이름을 따서 선곡동이라 함 신선이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선동(仙洞)이라 불렀음
이화리(梨花里)
  • 이불갈〔이화동(梨花洞), 이화촌(泥火村)〕은 전설에 의하면 배꽃이 만발하면 조문국 왕이 가끔 산책을 위하여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지며, 본래 의흥현 내화면 지역으로 고려시대에 니화촌(泥火村) 부곡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하기도 함. 비호골에 절이 있어 신 각시가 흰 고깔을 쓰고, 시주하러 다니는 광경을 보고 이부가리가 배꽃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화촌(梨花村)이라 부름.

의흥면

의흥(義興)이란 명칭은 예로부터 전쟁시 의병이 이 곳에서 활발히 일어났다 하여 붙여졌다.

읍내리(邑內里)
  • 읍내(邑內)라 함은 1914년 의흥군(義興郡)과 군위군(軍威郡)이 합병될 때 군 소재지였으므로 읍내(邑內)라 칭했다.
수북리(水北里)
  • 의흥 위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수북리(水北里)라고 부름.
수서리(水西里)
  • 의흥 위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수서리(水西里)라고 부름.
이지리(梨枝里)
  • 부락이 항상 따뜻하여 사람 살기에 알맞은 곳이라 가지곡(可止谷)이라 불렀는데 후에 가지(可止)가 가지 지(枝)자로 바뀌어 지동(枝洞)이라 칭했다. 또는 가지골에서 동쪽으로 이현(梨縣)이 있으며 이곡(梨谷)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품질좋은 배가 생산되어 임금님께 진상했다 한다.
파전리(芭田里)
  • 고치동(高致洞), 중동(中洞), 하동(下洞) 이렇게 3동을 합쳐서 구한말 당시 는 의흥군(義興郡) 파립면 파전동(芭田洞)이란 행정 명칭을 가졌지만, 그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파전동(芭田洞)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덕리(新德里)
  • 한 때 천연두가 의흥(義興) 고을에 만연하고 있었으나, 이곳만은 한 사람도 전염되지 않아 사망자가 없어 덕(德)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지호리(芝湖里)
  • 지초(芝草)가 무성한 작은 호수가 있는 부락의 편에 위치한다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연계리(蓮桂里)
  • 부락 가운데 연못이 있는데 이 못에 흰 연꽃이 많이 피었으며 또 닭같이 쉬지 않고 땅을 파일구어 잘 사는 부락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매성리(梅城里)
  • 마을 뒤편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의 혈(穴)을 사람의 혈에 비유하여 산의 형태가 중간이 잘록하여 사람모양과 비슷하여, 여자 혈(穴)이라고 부른다, 매(梅)란 말은 이 산의 혈을 여자에 비유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한편으론 고려시대 몽고족의 침입으로 이 곳에 성을 쌓고 군사들이 주둔 했으며 백성들이 피란하였다고 하여 성(城)자를 붙여 이 마을을 매성(梅城)이라 했다고 한다.
금양리(錦 陽 里)
  • 검동(儉洞) : 1379년 경에 칼을 잘쓰는 황무생(黃武生)이란 장군이 마을을 개척하여 칼 검(劍)자를 써서 검동(劍洞)이라한다.
원산리(元 山 里)
  • 예로부터 마을주변에 동서남북으로 산이 많다 하여 “원(元)”“산(山)”를 써서 원산(元山)이라 하였다.

산성면

현재의 산성(山城)은 고종 32년(1895)에 의흥군(義興郡) 부동면(缶東面), 신남면(新南面) 지역이었고 고종 33년(1896)에 경상북도 의흥군(義興郡)으로 되어 11개 동리를 관할하다 1914년 의흥군이 군위군(軍威郡)에 편입되면서 팔공산성의 이름을 따서 산성면으로 되면서 9개동을 관할하다 1983년 1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산리 금양리가 의흥면으로 편입되고 1988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화전리가 화전1,2리로 분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백학리(白鶴里)
  • 삼국시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입구에 흰 학이 많이 서식하는 바위인 백학암의 이름을 따서 백학리라 하고 전귀, 양지, 소하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 백학1리
    • 전귀(全歸) : 영천 신녕에서 안동, 서울로 통하는 길로 온전히 돌아오라는 뜻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효자가 많다고 해서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불려지게 되었다고도 함.
  • 백학2리
    • 소하(蘇下) : 선녀가 마을에 내려왔다는 전설에 따라 선래동이라 하기도 하고, 소하사의 절 이름 따서 윗마을은 소상, 아랫마을은 소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삼산리(三山里)
  • 팔공산, 화산, 조림산의 3산의 뜻을 따라 삼산리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범하동, 범상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 삼산1리
    • 범상(凡上, 三山) : 팔공산, 화산, 조림산이 다 보인다 하여 불려지게 되었으며, 조선 선조 때 최선인이 임란을 피하여 이고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함.
  • 삼산2리
    • 범실(凡室) : 풍수설 상 지형이 범상하고, 마을 전체모양이 범선과 같은 모양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 답곡(沓谷) : 큰 소(沼)가 마을 앞에 있어 논농사를 주로 하여 논골이라 칭함.
    • 굼마 : 구매에 들어섰다하여 붙여짐.
    • 양지(陽地) : 마을앞 저수지에 학이 놀다 가 이를 길조로 여겨 양지바른 산 아래 정착하여 붙여진 이름임.
봉림리(鳳林里)
  • 전주이씨의 집성촌으로 조림산이 높은 산이라 새가 많으므로 조자(鳥字) 위에 궤(几)자를 씌우고 숲이 우거졌다 하여 임자(林字)를 써서 봉림이라 불려지게 되었으며 범박, 반외, 반내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 봉림1리
    • 가뭄이 심하여 밭작물로 범박죽을 많이 먹었다 하여 범박동(凡朴洞)이라 불려지다, 이름이 좋지 않아 봉림리로 개칭하였다 함.
  • 봉림2리 : 반외동, 반내동, 역전, 범밀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 반내동(反內洞), 반외동(反外洞) :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용당골이라 하였으며 임란 후 농사를 짓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하여 반외동, 그 자리에 남은 마을을 반내동 이라 하였음.
    • 역전(驛前)마을 : 봉림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임.
    • 범밀마을 : 미상
무암리(武岩里)
  • 1914년 의흥군을 군위군 의흥면으로 개편할 때 여좌동, 아치동, 신령동, 범중동, 범하동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무덤동과 망덤의 뜻을 따서 무암리라 하였음.
  • 무암1리
    • 여좌동(余佐洞) : 1670년 최동헌이 마을을 개척하여 붙여진 이름임. 남좌리라고도 함
    • 새터 : 여좌동에서 새로 분리되어 이루어진 마을
    • 옥정(玉井) : 마을이 우물처름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샘을 팔 때 옥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 무암2리
    • 아치동(牙致洞) : 윤대선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번창한 마을로 만들어야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마을 옆의 산모양이 호랑이 이빨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용의 어금니가 마을에 떨어져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
운산리(雲山里)
  • 섶재, 새마아, 초당골, 큰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약 300년 전 박 수찬이 개척하였다고 함
    • 섶재 : 마을 개척 당시에 울창한 숲을 베어내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여졌으나 영천이씨가 이주하면서 구름과 산이 겸비하여야 잘 산다고 운산동으로 개칭함.
    • 새마아 : 본동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마을임.
    • 초당골 : 초당이라는 스님이 냉수가 먹고 싶어 바위를 파내고 샘물을 파서 마시고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
    • 큰골 : 계곡이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화본리 (花本里)
  • 조림산의 형상이 山如花根故花本이여서 붙여진 이름임.
    • 화본1리 : 약 500년 전 김달영이 개척한 마을로 신내미, 하동, 본동이라 부르며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임.
    • 화본2리(중동) : 1479년 엄광순이 개척한 마을로 상동과 하동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
    • 화본3리 : 약 400년 전 최민이 개척한 마을로 상동(춘못)이라 함.
화전리 (花田里)
  • 화전1리 : 1356년 은진송씨가 개척한 마을
    • 피밭골 : 황무지에 피가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화전2리
    • 화수곡(花樹谷) : 약 250년 전 이 골짜기에 꽃나무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

삼국유사면

신라시대(467년)에 고로부곡(古老部曲)이라 불리었으며, 고려시대 (1062년)는 귀산현과 부림현을 병합하여 의흥군으로 되었다가 현종 9년에 안동군에 귀속되었으며, 조선시대(1408년)는 의흥군 소수면(義興郡 小首面)과 의성군 소야면(義城郡 巢野面)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부군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개편시에 다시 통합되어 그당시 고로실(현재괴산리) 이름을 따서 고로(古老)라 칭해져 오고 있다.

화수리(華水里)
  • 집실(集室)·가곡(家谷)·하회(河回)라고 불리기도 한 이 곳은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산이 준엄하고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가곡(家谷)이라 칭함. 그 후 280년 전 김영 김씨(金寧 金氏)가 자리 잡아 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고 집실(集室)이라고 부름. 물이 마을을 안고 돌아 흐른다고하여(乙자 모양: 점이 마을) 하회(河回)라 함. 그 뒤 1914년 행정 개편으로 화수(華水)라 칭함.
  • 여덕(汝德)이라는 곳은 장명호(張命虎)라는 선비가 약 4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계곡이 깊고 숲이 울창 하여 여덕(汝德)이라 칭하였다. 일설에는 약 300년 전에 장대 유(張大維)라는 선비가 사람이 숲의 덕을 본다고 하여 여덕 (汝德)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넌덕이라 함. 그리고 이 곳에 영천군 신녕면으로 넘어가는 갑티재라고 하 는 재가 있는데 장군의 갑옷 입은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불 려짐.
화북리(華北里)
  • 인각(麟角)이라고 부르는 곳은 화북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인각사 앞에 있으므로 인각이라 함. 인각사(麟角寺)의 유래는 사찰 맞은 편에 학소대라는 가파른 절벽이 있는데 여기서 놀던 기린이 암벽에 떨어져 뿔이 빠져 서 인각사라 하였다 고려때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으며 보각국사비가 있다.
  • 둥디이·둥딩·둥둥이·부부(缶缶)라고 부르는 곳은 부락 뒷산이 흡사 장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소리가 둥둥나는 것 같다고 해서 둥디이라고 불렀다.
  • 쌀매기·쌀미기·용암(龍岩)이라고 부르는 곳은 쌀이 많이 났다 하여 쌀매기라 불렀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마을 입구에 있으며 골짜기에는 용추폭 포(龍湫瀑布)가 있는데 비류직하 수십척이라 옛날에 의흥군수 가 큰 가뭄때 기우제를 올리던 곳으로 신령한 곳이라 한다.
  • 화산A지구·재건동(再建洞)이라고 부르는 곳은 1962년 정착민 들로 구성된 A,B,C,D마을이 산재되었는데 군부대가 주둔하여 민간 주민들은 A지구 마을만 그대로 두고 다른 부락은 다 철거 시켰다. 철거민은 주변지역인 감자골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감자골은 영천군 신녕면 화남리이며, 권오룡(權五龍)이 세계 제 2차 대전 때 징용 및 보국대로 주민들이 끌려가자 남은 사람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화산(華山)벌을 개간하여 감자를 많이 심어 감자골이라고도 한다.
  • 덕치·덕천(德泉)이라고 부르는 곳은 인각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바위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자연샘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맑다. 옛날에는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치료 할 수 있어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근래에 유림에서 화산성(華山城)을 축조한 괴간 윤숙(槐杆 尹 淑)을 추모하는 경막단(景幕壇)을 설치 하였다.
괴산리(槐山里)
  • 고로실·괴리곡·골실·고로곡(古老谷)·환동(環洞)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신라시대 이지방을 고로부곡이라 칭하였다.
  • 골마당·동정(洞庭), 동지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이곳에 가장 먼저 피란온 사람은 金씨라 전해지고 있다.
  • 돌골·석전(石田)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이곳은 부락 및 논밭 일대에 큰 바위와 돌이 많아 돌밭이라 하다가 石田이라 불리워졌다.
  • 새산·신산(新山)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돌골보다 좀 늦게 생겼 으며 산 아래에 새로 생긴 부락이라 하여 새산이라 불림.
학성리(鶴城里)
  • 태자뱅이·태암(台岩)이라고 부르는 면소재지는 부락 옆에 태자암(太子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태자(太子)가 서있는 모양 같다고 하여 자(子)를 뺀 태암이라 부름.
  • 청학(靑鶴)이라고 부르는 곳은 인각사(麟角寺) 맞은 편에 가파 른 절벽이 학소대(鶴巢臺)이고 청학리(靑鶴里) 뒷산에 있는 큰 바위가 태자암(太自岩)이다.
  • 용아(龍牙)라 부르는 곳은 마을 입구의 산형이 좌우가 용아 같 다 하여 이름을 용아라 부르며,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람이 살 고 있었으며, 안용아·내용아·파성(巴城)이라고 부르는 곳은 용 아(龍牙)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안용아라고 부름.
장곡리(長谷里)
  • 개머리·당마·당리(堂里)·구두(狗頭)라고도 하며, 마을 앞산이 개가 엎드려 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이므로 개머리 라고 하고 동재를 지내는 당나무가 있어 당리(堂里)라고도 한다.
  • 바랑골·바랑개머리·정곡(正谷)이라는 곳은 개머리에서 곧게 동북 방향으로 길게 바로 뻗은 골짜기라 하여 정곡(正谷)이라 칭하였으며, 와전되어 바랑골이라 한다.
  • 한티·안개머리·경림동(瓊林洞)이라고 부르는 곳은 영천으로 가는 길에 한티재 대현(大峴)이 있으므로 한티라 하고, 구두 (狗頭)의 안쪽에 있기에 안개머리라 부르기도 하고, 경림산(瓊 林山) 아래에 위치하므로 경림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곡리(仁谷里)
  • 지경(地境·내포(內浦)라고도 하며, 이조때 의흥군 소수면(義興 郡 小首面)과 의성군 소야면(義城郡 巢野面)의 경계가 내를 기준하여 양지마을은 소야면(巢野面), 음지마을은 소수면(小首 面)에 속하므로 지경이라 칭하였으며, 일명 내포(內浦)라고도 하는데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르므로 불리어진 지명이다.
  • 대인골·대인(大人)이라고 불리는 곳은 마을 입구의 산중턱에 높이 솟은 이름이 장군석(將軍石) 또는 대인석(大人石)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대인(大人)이 대인(大仁)이라고도 한다.
  • 병팜·병풍암(屛風庵)이라고 불리는 곳은 부락 주위에 바위가 병풍같이 둘러 싸여 있으며, 1300여 년 전 신라시대 암자가 마을 안에 있었으므로 불려진 지명이다.
  • 분재골·분령곡(分嶺谷)이라고 불리는 곳은 영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방하산(方可山)이 솟아 있으며, 방하산(方可山)을 넘어 서 영천(永川)으로 통하는데 그 고개를 分峴이라고 하여 분재 골이 되었다.
양지리(陽地里)
  • 머내·머귀내·머기내·머내기·오천(梧川)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을로 앞냇가에 오동(梧桐)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머내 부락의 한가운데를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를 경계로 서쪽 마을은 해가 일찍 돋고 따뜻하다고 하여 양지마라고 하며, 개천의 동쪽 마을은 해가 늦게 돋고 춥기 때문에 음지 마라고 불린다.
낙전리(樂田里)
  • 3골짜기(갈산골, 싸리발골, 연밭골)가 있는데 갈산골·갈선(葛 仙)·갈산곡(葛山谷)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부근 산에 칡이 많이 얽혀져 있고, 신선한 곳이므로 갈선이라 하였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갈산골·갈상으로 불려지고도 있다.
  • 싸리밭골·쌀밭골·축전(杻田)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인접한 산에 싸리가 많았으며, 그 동네가 생길 때 싸리를 베어 낸 터에 집과 농토를 개간하였다고 한다.
  • 연밭골·연전(蓮田)·연방(蓮房)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부락 주위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는 옛날에 연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연밭골이라 불리워지기도 하고, 또 이곳 산세가 마치 연꽃이 물위에 더 있는 것 같은 지형이라서 연밭골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가암리(加岩里)
  • 노리맛·노리목·장항(獐項)·하리(下里)라고 부르는 이 곳은 가암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옆에 노리(노루) 형의 산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노리목 혹은 노리맛으로 불려진다.
  • 안노리맛·중리(中里)라고 부르는 이 곳은 노리맛이란 부락은 두 개의 마을이 합해져서 형성되었는데, 안쪽에 위치한 부락을 일컬어 안노리맛이라 한다.
  • 흰더미·흰덤·백암(白岩)라고 부르는 이 곳은 안노리맛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뒷산에 흰덤이 있어 백암·흰덤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 부채미기·부채매기· 불항(佛項)라고 부르는 이 곳은 노리맛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지형이 부처의 목과 같이 생겼으며 돌부처가 있었다 한다.
석산리(石山里)
  • 석정(石井)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부락 서쪽 입구에 돌샘이 있는데 돌 사이에서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어 붙어진 이름이며,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 유사골·유사(有司·有寺)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들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 부락뒤에 불사당(佛寺堂)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유사골이라 한다.
학암리(鶴岩里)
  • 서낭골·성황골·성황동(城隍洞)이라고 하는 이 곳은 신라 선덕 여왕때 의상조사가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의 이름이 성황사(城 皇寺)라 불렀는데 현재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아직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절이 있을 때는 민가가 없었다고 하며 그때의 성황사에 의해서 동내이름이 서낭골이 된 것같다.
  • 동부(東部)·방학동(放鶴洞)이라고 하는 이 곳은 바우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은 동쪽의 경계점이었으며 지금도 영천군과의 경계지점이다. 부락 뒷편 고개위에서 학을 놓아주 었다는 설에 따라 방학동(放鶴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선기동·신기(新基)·신기동(新基洞)이라는 곳은 마을 부근의 산이 묘하게 생겨 신선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 큰학골·대학동(大鶴洞)이라는 곳은 산의 모양이 학과 비슷한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큰 봉우리 아래 형성된 골짜기를 말하는데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기에는 부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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