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공유 공간 군위문화원
군위읍(軍威邑)은 본래 군위현(軍威縣)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오항(烏項) 아천(촌)衙川(村), 성지(城旨), 노상(路上),노하(路下), 우정(右政) 백령(白嶺), 오곡(梧谷), 동토(東吐), 상토(上吐)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노동멱현(奴同覓縣)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군위현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군위현이 상주목에 속하였고, 인종 21년 (1143)에 다시 군위현이 일선군으로 환속되었다. 고종 32년 (1895)에는 다시 군위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고종 33년(1896) 8월 4일 훈령 제 35호로 13도제가 실시 됨에 따라 경상북도 군위군에 속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위군(軍威郡) 남면(南面)의 중무(中武), 하무(下武) 용성(龍成), 서군(西君), 장수(長水), 지동(池洞) 구지(鳩池), 금곡(金谷)의 9개 마을과 서성면(西城面)의면곡(綿谷), 내량(內良), 외량(外良), 구명(鳩鳴), 송현(松縣), 삽령(鈒嶺), 내북(內北), 외북(外北), 중북(中北)의 9개 마을과 소본면(召本面)의 농암동(籠巖洞)일부와 의성군(義城郡) 억곡면(億谷面) 용대(龍臺), 토일(吐一)의 2개 마을을 병합하여 군위면(軍威面)으로 개편하여 무성(武成), 수서(水西), 사직(社稷), 금구(金鳩), 내량(內良), 외량(外良), 삽령(鈒嶺), 대북(大北), 동부(東部), 서부(西部), 정동(政洞), 오곡(梧谷), 하곡(下谷), 상곡(上谷), 용대동(龍臺洞)의 15개동(洞)을 관할하였다.
1915년 1월 1일 부령 제173호로 의성군 소문면(현 용대리)이 군위군 군위면에 편입되었으며(1914년 12월 22일 편입 결정),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의성군 금성면(義城郡 金城面) 광현 1, 2, 3동(廣峴 1, 2, 3洞)을 편입하여 16개 동을 관할 하였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軍威面)이 군위읍(軍威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소보면(召保面)의 대흥 1, 2동(大興 1, 2洞)을 편입하였다. 1996년 3월 13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군위읍 서부1리가 서부 1, 3리로 분리되어 현재 34개의 행정리와 이에 속한 57개의 자연마을을 관할 하고 있다.
본 면은 고려시대 이전의 연혁이 문헌에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 조선시대 화곡면, 소소보면, 석본면으로 군위현에 속하다가, 고종 32년 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부, 군, 면을 통폐합함에 따라 소소본면의 10개동(대흥, 농암, 상소, 하소, 범바, 부흥, 달천, 언실, 모로, 상우), 석본면의 7개동(서경, 괘겸, 평지, 산법, 하계, 상원, 안령), 화곡면의 12개동(화실, 사촌, 달산, 낭성, 백현, 보촌, 복성, 율리, 사지, 두개, 수철, 대량), 선산군 산동면의 3개동(신흥, 산개, 오류)를 병합하여 소보면이라 칭하고 있다.
현재의 효령면(孝令面)은 신라 초(490년경)에는 모혜현(芼兮縣)이었지만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효령현(孝靈縣)으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군위현(軍威縣)으로 예속되었다.
한편 孝靈이란 지명은 9세기경부터 孝寧(효령)으로 쓰여 오다가 15세기 孝寧大君(효령대군, 1396~1486)의 함자를 피휘하여 孝令(효령)으로 글자가 바뀌었다. 시대에 따라 효령의 령이 靈→寧→令으로 변하여 간 것이다.
처음 지명 孝靈(효령)은 孝(효)에 정령(精靈 ; animism)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지명의 유래는 마을사람들이 김유신장군을 어버이처럼 섬긴다는 의미에서 경덕왕이 만든 이름이다. 현재 쓰이고 있는 孝令(효령)이란 지명은 백성들의 마음씨가 착하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 효령면의 치소(관아)는 현재의 효령면 장기3리 고지바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건물도 모두 없어졌다. 옛 기록에 따르면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동남쪽 70여 걸음 되는 곳에 임창(任倉)이 있었고 동북쪽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옥사(獄舍)가 있었으며 또 북쪽 3리쯤 되는 현재의 장군1리(나실)에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쓰이고 있는 효령(孝令)라는 지명은 박약지(朴約之)가 17세 때 부친상을, 그리고 모친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에 각각 3년간 묘(墓)를 지키며 효(孝)를 정성껏 하던 중, 어느 날 들불이 일어나 여묘까지 번지려 하자 약지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孝” 자를 따서 孝令이라 친하였다고 함.
본 면은 고려왕조이전의 연혁은 문헌이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고려왕조에 부계현이라 칭하여 현내(창평,가호,춘산,신화) 현서(고곡, 매곡) 부남(대율,동산,남산) 3개면으로 구획하였다가 다시 조선초기에 이르러 의흥현과 합병되었던 것이 또다시 1914년 3월 부.군.행정구역 변경에따라 정비한 현내 현서 부남의 3개면을 합병하여 부계면이라 칭하고있다.
우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우보인(以友補仁)"의 우애로써 인(仁)을 서로 돕는다는 뜻과 보(保)의 오래 보전시키자는 의미로 사용하게되었다고 함
의흥(義興)이란 명칭은 예로부터 전쟁시 의병이 이 곳에서 활발히 일어났다 하여 붙여졌다.
현재의 산성(山城)은 고종 32년(1895)에 의흥군(義興郡) 부동면(缶東面), 신남면(新南面) 지역이었고 고종 33년(1896)에 경상북도 의흥군(義興郡)으로 되어 11개 동리를 관할하다 1914년 의흥군이 군위군(軍威郡)에 편입되면서 팔공산성의 이름을 따서 산성면으로 되면서 9개동을 관할하다 1983년 1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산리 금양리가 의흥면으로 편입되고 1988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화전리가 화전1,2리로 분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신라시대(467년)에 고로부곡(古老部曲)이라 불리었으며, 고려시대 (1062년)는 귀산현과 부림현을 병합하여 의흥군으로 되었다가 현종 9년에 안동군에 귀속되었으며, 조선시대(1408년)는 의흥군 소수면(義興郡 小首面)과 의성군 소야면(義城郡 巢野面)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부군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개편시에 다시 통합되어 그당시 고로실(현재괴산리) 이름을 따서 고로(古老)라 칭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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